2014년 3월 29일 토요일

친절

공무원이 친절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쪽은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문에 욕도 많이 먹고 있죠. ^^;;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몇해전 어느 장관 때 일입니다.
그 장관의 자식이었던가? 아무튼 아주 가까운 사람이 인천공항에서 출입국심사를 받았습니다. 그 때 저희 직원에게 '푸대접'을 받았다고 느꼈나 봅니다.
그 일로 저희 조직에는 장관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사실관계를 해명하는 사람에게는 '그럼 내 자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라 호령이 돌아왔고,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통행료 징수하는 직원들 봐라, 얼마나 친절하냐. 너희는 왜 그모양이냐'는 질책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곧바로 '친절'이 저희 조직을 휩쓰는 태풍으로 되어 버리더군요.

공무원이 친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저희의 기본적인 임무는 국경관리입니다. 친절은 그 다음 일이지요. 쉽게 말하면 저희는 대한민국의 경비견입니다. 애완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경비견에게 애완견처럼 못한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죠. '친절'과 '민완' 모두가 중요한 가치입니다만,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저희 쪽에서는 당연히 '민완'입니다.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는다고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설명해보자면, 저희도 검/경과 같은 공안직군에 속합니다. 수사관이 가장 먼저 갖춰야하는 것이 뭘까요? 친절? 당연히 민완입니다. '참고인에게 친절하지만 범인은 못잡는 수사관'을 생각해보십시오.
저희도 똑같습니다. 출입국심사는 '그냥 여권에 도장찍어주는 일'이 아닙니다. 국익위해사범이 국경을 통과하지 못하게 막는 일입니다. 저희가 출입국심사를 할 때 중요한 것은, '환하게 웃으면서 여권에 보기좋게 도장찍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이 사람이 테러범/인터폴 수배자/불체자/출국금지된 범죄자인가, 이 여권은 위변조된 것인가, 타인여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닌가 등등을 놓치지 않는 것이죠.
신경을 곤두세워 이런 것들을 살펴보면, 당연히 얼굴은 굳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다른 기관 분들과 자리를 함께한 일이 있습니다.
어느 분께서 저희에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출입국은 왜 그리 불친절하냐고. 뭐 솔직히 그 쪽도 친절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던 터라,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도 합니다만 ^^;;
듣고 있던 국정원 직원이 조용히 한마디 하더군요.
'출입국관리사무소는 관광안내소가 아닙니다'
그 분은 저희가 뭘 해야 하는 집단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외국에서 ‘출입국심사 서비스 부분’ 최고상을 수상하거나, 세계공항서비스평가(ASQ)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절대 자랑이 아닙니다.
윗분들이나 대외홍보를 맡은 분들은 큰 자랑으로 여기겠지요. 그러나 우리 조직이 지켜야 할 기본이 무엇인지, 저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잃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자랑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장관이 질책이 쏟아지자, 일선 현장은 뒤집어졌습니다.
마침 당시 기관장도 소신있다는 소린 못 들어본 사람이었나 봅니다. 제가 그 때 그 곳에 근무하지 않아서 잘은 모릅니다만, 볼만한 사태가 벌어졌다는 군요.
심지어 불친절한 팀으로 찍힌 곳은 간부들이 검찰에서 조사까지 받았다네요. 솔직히 저는 이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불친절한 것도 범죄가 아닌데, '부하가 불친절한 것'으로 무슨 검찰조사를 받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걸 당한 사람은 울분을 토하더군요. 불려간 자신도 황당하고, 조사를 해야하는 검찰직원도 어이없는 일이라, 서로 민망하게 앉아서 잡담 좀 하다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 때 국경관리에는 거의 구멍이 뚫려있었습니다.
친절하라고 했을 뿐인데 무슨 구멍이냐 싶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모든 일에는 불만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저희가 하는 일은 더욱 그렇죠. 물론 저희가 하는 일에 실체적/절차적인 법적하자가 있다면, 그에 대한 항의는 받아들여져야 하죠.
하지만 말도 안되는 트집은 단호하게 배척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불체자 단속시 '사전 예고도 없이 단속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불체자가 놀라지 않느냐', '왜 단속에 가죽장갑을 끼고 왔느냐'라는 불만[모두 실제 있던 것들입니다]은 받아들여져서는 안되는 것이죠. 그런 트집이 받아들여지면 공무집행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런 상황에서는, 무슨 일이든 '공무원이 불친절하다'로 트집잡으면 끝입니다. 아무리 정당한 공무집행이라도, '왜 그렇게 불친절하냐' 한마디에 담당자가 깨지거나 좌천되는 분위기에서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뚫릴 수 밖에 없죠.

이 일은 장관의 산하기관 업무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거기에 장관 말이라면 꼼짝못하는 고위 공무원들이 일을 키웠죠.
손해는 말단 공무원들이 봤고, 피해는 사회 전체가 봤습니다. 국경이 뚫렸으니까요.

문제는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일을 모르는 위/ 소신없는 아래는 저희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규제개혁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은 이때문입니다[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은, 불합리한 규제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언론에서는 규제가 공무원 집단의 탐욕이 만들어낸 것으로, 대통령도 어쩌지 못하는 괴물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규제는 법률에 위임을 받은 행정규칙[훈령/예규 등. 일선에서는 지침이라고 부르죠]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행정규칙들은 장관 또는 해당 조직의 장이 결재권자입니다. 기안자는 사안에 따라서 다릅니다만 6급 주사에서 5급 사무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규제가 공무원의 탐욕에서 비롯된 말도 안되는 것이라면? 결재권자가 결재 안하면 그만입니다. 모르고 결재했다면, 나중에 폐기하라고 지시하면 그만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장관만 진노해도 조직이 뒤집어지는데, 대통령도 못 고치는 규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헌법학이나 행정법학에서 행정규칙에 대한 통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만, 현실에서는 거기까지 갈 일도 없습니다. 정말로 잘못된 규제라면, 언론보도만 한번 나와도 얼마 뒤에 폐기됩니다.

그러면 언론에서 아무리 비판하고, 여론이 들끓어도 바뀌지 않는 규제는 뭘까요?
간단합니다. 그게 옳거나, 현실적으로 어쩔수 없는 일이겠죠. 언론에서 몰랐거나/다루지 않은 다른 사정때문에 꼭 필요한 규제이거나,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규제개혁 끝장토론을 잠깐 보았는데, 참 씁쓸했습니다. 그 때 마침 끌려 나온 규제는, 제가 알기로는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규제로 불편을 겪는 사업주들이야 불필요한 규제라고 주장하겠지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는 완전히 얘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장관이 자기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이러저러해서 꼭 필요한 규제라고 당당하게 설득할 수 있었겠죠. 그러나 그러지 못하더군요.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씁쓸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습니다. 제 역량이 모자라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